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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轻的时候常会被问及梦想是什么,回答时,又常会说到我的父母寄希望于我成为怎样的人。
젊을 때는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본 질문을 많이 받았고, 대답할 때는 항상 저희 부모님이 저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고 말하기도 했다.
东亚的传承观念当中传递的不只是血脉,还有上一代人被年华吞噬的梦想和追求。
동아시아의 전승 관념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은 혈맥뿐만 아니라, 조상 세대가 나이와 나이에 삼켜버린 꿈과 추구하는 게도 많이 내려왔다.
朋友黎光现在在美国留学硕士,在服装设计领域极具天赋的他被父母安排到了会计专业,每当说到当初的选择,他总是笑着避之不谈,业余时间也全部游走在各大时装秀场之间的他说,此刻是他人生的最后一次“自我救赎”。
친구인 리코는 미국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의류디자인 분야에서 재능 있는 부모로부터 회계에 배정받아 전공 선택에 대해 항상 웃으며 외면하고, 여가시간에도 각종 패션쇼장을 돌아다니는 그의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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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个月好久未见的发小和我说自己翻出从前的日记,折旧的信纸上全是他的梦想,德语,法语,健身,攀岩。
지난달 오랜만에 만난 가장 친구가 자기 예전 일기를 꺼내 보니, 감가상각의 편지지가 모두 그의 꿈을 썼어, 독일어, 프랑스어, 헬스, 암벽등반까지도 이었다.
记得他高中时憧憬进入军校为国效力。如今在石油钻探专业摸爬滚打,现实面前,他最终低头走向了家族替他谋划的方向。
그가 고등학교 때 군교에 진학해 국가를 위해 복무하는 것을 동경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지금은 석유 시추 전문에서 이리저리 뒤척거리는데, 현실 앞에서, 그는 결국 머리를 숙이고 그를 대신해 가족이 도모하는 방향으로 갔다.
服从家族的选择,
可能也是服从自己的实力。
가족에 복종하는 것도 아마 자신의 실력에 복종하는 것일 것이다.
而选择服从命途究竟在哪里?
眼前的一生究竟是在传承谁的梦想?
운명은 과연 누가 잡고 있고, 눈앞에 있는 일생은 과연 누구의 꿈을 이어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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钢琴家兼作曲家梁邦彦,即使他的名字很陌生,但你肯定也听过他的音乐. 他是制作2002年釜山亚运会主题曲《frontier》的主人公. 创作了以三星,索尼,尼康,新韩金融集团CF为背景的音乐.和游戏《永恒之塔》的背景乐,在韩国是家喻户晓的人物. 如果你看过平昌冬奥会开幕式,就听到了他创作的音乐.
양방언,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그의 이름이 낯선 사람이라도 한번쯤 그의 음악을 들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주제곡 ‘프론티어(frontier)’를 만든 주인공이다. 삼성·소니·니콘·신한금융그룹 CF에 배경으로 깔린 음악을 만들었다. 게임 아이온의 OST ‘The Tower of Eternity’도 마찬가지다. 평창동계올림픽 개·폐막식 중계를 봤다면 그가 만든 음악을 들은 것이다.
毕业于日本医科大学的他,还当过麻醉科医生,但最终他放下一切开始走上音乐家的道路. 为准备18年11月的大韩乌托邦音乐会,目前来到了韩国。
일본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마취과 의사로도 일했지만 결국 모든 걸 뒤로하고 음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1월에 있을 유토피아 콘서트 준비로 한국을 찾아왔다.
在平昌冬奥会开幕式上,他负责"花滑女王"金妍儿点燃圣火的背景音乐. 点火后,他还将负责舞蹈组合的演出音乐和女高音黄秀美独唱的奥运会赞歌.
평창올림픽 개막식에서 '피겨 여왕' 김연아가 성화대에 점화하기까지의 배경음악을 담당했다. 점화 이후 댄스팀 ‘저스트 절크’ 공연 음악과 소프라노 황수미가 독창한 올림픽 찬가도 그가 맡았다.
在演出之前,他一直在做修改. 原本计划在开幕式上只有1名北韩选手上台阶. 应北韩方面的要求,突然改为2名北韩选手同时登上. 但以一个人上山时为准制作的音乐,一不小心就会不合时机. 音乐也可能有提前结束的担忧. 因为太在意直播效果,他忍着胃疼.
공연 직전까지 수정의 수정을 거듭했다. 원래 개막식에서 북한 선수만 계단을 오를 예정이었다. 북한 측 요청으로 이틀 전 남·북한 선수 2명이 함께 오르는 걸로 바뀌었다. 혼자 오를 때를 기준으로 만든 음악이라 자칫 타이밍이 맞지 않을 우려가 있었다. 선수들이 성화대에 오르지도 않았는데, 음악은 끝나버리는 끔찍한 상황이 닥칠 수 있었다. 다시 녹음을 하거나 연습할 여유는 없었다.공연 내내 신경을 너무 써서 위가 아프더라구요.”
现在正在准备的"乌托邦演唱会"是他一年的集大成的重要演出. 与韩日音乐人在一起. 摇滚乐队"国喀斯滕"主唱河玹雨和日本吉他手大盐子太郎将作为嘉宾出席. 这次演出结束后,他又会返回日本巡演。
이제는 콘서트 유토피아를 준비한다. 유토피아는 그의 한해를 집대성하는 공연이다. 한·일 뮤지션들과 함께한다. 록밴드 국카스텐 보컬 하현우, 일본 기타리스트 오시오 코타로가 게스트로 선다. 국내 일정이 끝나면 일본 투어를 시작한다.
‘这些年,从边缘人到无局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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他的父亲是济州人,母亲是新义州人.父亲是朝鲜国籍,母亲是韩国国籍.因为他的出身和国家体裁之间有着不同的特点,所以人们把他称为"边缘人","无局限的音乐家".
제주가 고향인 아버지와 신의주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의 국적은 반대다. 아버지는 북한, 어머니는 한국 국적이다. 북한 국적으로 30여년을 살다 1996년 한국 국적을 획득했다. 그의 출신과 장르를 넘나드는 특징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경계인’, ‘무경계 뮤지션’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因为自己的出身,经常听到别人说'辛苦了'. 当然小时候就曾苦恼过'我是谁','人生为什么会这样'.有一次,摄影家裴炳宇对他说'像你这样在自我思考的人经常做奇怪的事情',我对此深有同感. 思考中的人,和音乐人在一起,会变的很开心."
“출신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셨겠다’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당연히 어릴 때 ‘나는 누굴까’, ‘인생이 왜 이럴까’ 정체성을 고민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너무 무겁게 비치진 않았으면 합니다. 한번은 배병우 사진작가가 ‘너처럼 경계에 있는 사람이 이상한 짓을 많이 한다’고 했는데, 동감합니다. 경계 중간에 있는 사람으로서 다양한 뮤지션과 함께해 좋습니다.”
从小学1年级开始,她与年仅12岁的姐姐一起学习钢琴. 正式开始关注音乐是从初中开始. 迷上了收音机里传来的摇滚音乐. 他曾在父亲创立的朝鲜学校上学. 对于西方音乐感兴趣的他,周围的视线并不友好.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12살 터울인 누나와 함께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중학교 들어서부터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록 음악에 사로잡혔다. 그는 아버지가 공동창립한 북한계열 학교에 다녔다. 서양음악에 관심 갖는 그를 보는 주변 시선은 곱지 않았다.
"在学校老师用板子打我. 在家里如果不学医生,全家人都命令我奔向药剂师. 如果想做音乐的话,必须先满足父亲的期待,所以决定去了医科大学. 但我还想找大学里的音乐人继续做音乐. 虽然不能说出来,自己确实是为了做音乐去了医科大学."
“선생님이 절 때리고, LP판을 부순 적도 있어요. 집에서는 온가족이 의사 아니면 약사를 향해 달려가는 분위기였습니다. 일단 음악을 하려면 아버지 기대를 채워야 했고, 의대에 가기로 했죠. 또 대학에서 음악하는 사람들을 찾아 음악을 계속할 생각이었어요. 말이 안되지만, 음악을 하려고 의대에 갔죠.”
但在医大很难找到能唱歌的人. 一般综合大学的在校生超过1万人. 但他就读的日本科学院一年只有100多名学生. 但是他不能放下音乐.课余就跑去其他大学,找一起做音乐的人. 那时与明治大学出身的乐队天方结缘. 作为键盘手站在舞台上,进行了半职业的活动. 那段时间医大课程虽被抛诸脑后,但很快乐。
하지만 의대에서 음악 하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보통 종합대의 재학생 수가 1만명을 넘는다. 그가 다닌 일본의과대는 6년제 단과대로 한 학년에 100명 남짓한 학생이 있었다. 그래도 음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다른 종합대학에 가서 음악을 같이할 사람을 찾았어요. 메이지대학 출신으로 이뤄진 밴드 티스퀘어와 인연이 닿았습니다. 뮤지션 무대에 키보드 세션으로 서면서 세미프로 활동을 했습니다. 당연히 의대 수업은 뒷전이었죠.”
"许多年轻人都会苦恼'要不要继续追梦想'. 无论做什么样的选择,希望你都能认真思考. 在选择音乐之前, 梁邦彦说他也有过3次岔路口. 都要思考到底想做音乐还是在业界处于哪种程度. 而且不能一直只想着. 要逼着自己做判断. 下决定以后,不要再回头,要努力. 要给自己的人生以誓言."。
“많은 뮤지션 지망생이 ‘음악을 계속할 것이냐’를 고민할 겁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치열하게 고민하길 바랍니다. 저도 음악을 택하기 전 3번의 갈림길이 있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의사 면허를 따기 전, 도쿄대 마취과로 가기 전에요. 음악을 정말 하고 싶은지, 업계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 생각만 하면 안 돼요. 판단해야 합니다. 그다음 결단하고 나면 고민하지 말고 달려야 해요. ‘3년간 온 힘을 다해보고 안되면 접는다’든지 한계를 정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但父亲始终没有答应他的选择. 与父亲有矛盾的他带着5万日元离家出走. 只要是演唱会,live cafe,studio等可以演奏的地方,无论是哪里他都会去. "离开家一年半来生活很辛苦. 除了演奏以外,还通过其他兼职来充当生活费. 因为有医生执照,还会偶而做一些医疗兼职。"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끝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갈등하던 그는 5만엔(50만원)을 들고 가출했다. 콘서트·라이브 카페·스튜디오 등 연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집을 나와 1년 반 동안 생활이 힘들었어요. 연주 이외에 다른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당했습니다. 의사면허가 있어서 공장이나 회사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건강검진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어요.”
从1986年开始,他与日本的滨田昭吾和香港的摇滚乐队碧昂德站在舞台上. 一年就进行了150场演出. 忙得不可开交,甚至到了威胁健康的程度. 1996年他以《The Gate of Dreams》正式出道. 凭借7张个人专辑和音乐导演活动,他用自己的作品走过了20多年.
1986년부터 J-POP의 하마다 쇼고와 홍콩의 록 밴드 비욘드와 무대에 섰다. 하마다 쇼고의 경우에만 한해 150번의 라이브 공연을 했다. 가수들의 작·편곡, 프로듀싱을 하며 명성을 얻었다. 건강을 위협받을 만큼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 1996년 ‘The Gate of Dreams’으로 데뷔했다. ‘양방언의 음악’을 찾기 위해서다. 이후 7장의 솔로앨범과 음악감독 활동으로 20여년을 달렸다.
他曾经有一段自卑感,来自于周遭的不认同,他逼着自己集中于积累音乐经验. “大学时,我经常看书,又经常去庆典. 自己做兼职付钱去."他凭借着自己的学识积累,30岁之前,他就已经担任了《济州音乐节2017》的艺术总导演.
그는 한때 음대를 나오지 않았다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30~40대에 책을 많이 읽었어요. 또 축제에 자주 갑니다. 직접 돈을 내고 갑니다. 그런걸 보면서 ‘제주에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는 얼마 후 ‘제주 뮤직 페스티벌 2017' 예술감독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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还是篇首的问题,梁邦彦用能够传递‘幸福‘的音乐观给了答案,"听音乐的人最重要的是'幸福'. "制作能轻易接近听者的音乐,能够帮助观众享受电影,电视剧和纪录片的音乐,让所有人在聆听音乐时都能感到幸福"。
편수의 문제에 대해 양방언의 답은 '음악을 듣는 사람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다.그의 음악관은 ‘행복’이다. “음악을 듣는 사람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 듣는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
18岁,把音乐和医学撕裂,片刻的沉浸让他有短暂的喜悦。
18세에 음악과 의학을 찢고 잠시 침잠해 그는 잠시 기쁨을 느꼈다.
20岁,逼着自己权衡两边,整日的思考让他扪心拷问,辗转难眠。
20세에 양쪽을 저울질하며 하루 종일 고민하던 그는 엎치락뒤치락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23岁,医学取得成就之后,他决然全身而退,转身尝试去追回音乐。
23세에 의학이 성취된 후, 그는 결연히 몸을 돌려서 음악을 따라잡으려 한다.
那一天开始,他再无迟疑,焦虑和等待。
그날부터 그는 더 이상 초조해 하지 않았다.
他明白即使医学上有再多光彩也是止步不前
의학적으로 아무리 성공을 해도 지지부진하다
他相信自己会在音乐上有更多的成长,所以他不甘放弃,曲折中他永怀执念。
자신이 음악적으로 더 많이 성장할 수 있다고 믿으며, 곡절 속에서 그는 영원히 집념할 것이다.
取舍之间,虚幻的名利局开始雾散。
선택에서 명리에 초연해지고,
取舍之间,真正的人生路开始浮现。
선택에서 전망이 밝아지겠다。
(本期全文编辑翻译:李丞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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